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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우치 쓰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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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리우치 쓰네오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 정치인이다. 고후 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1965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투수로 입단하여 1966년 센트럴 리그 신인왕과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팀의 'V9' 시대를 이끌었으며, 1972년 센트럴 리그 MVP, 1972년과 1973년 일본 시리즈 MVP를 2년 연속 석권했다. 1972년부터 1978년까지 골든 글러브상을 7년 연속 수상했고, 1983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203승을 기록했다. 은퇴 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코치와 감독을 역임했으며, 2013년에는 참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2008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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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우치 쓰네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10년의 호리우치 쓰네오
2010년, 도쿄 시부야에서의 가두 연설 중인 호리우치 쓰네오
출생일1948년 1월 16일
출생지야마나시현 고후시
신장178cm
체중73kg
타석우타
투구우투
선수 정보
포지션투수
등번호18
데뷔 리그NPB
데뷔 일자1966년 4월 14일
데뷔 팀요미우리 자이언츠
최종 출장 일자1983년 10월 22일
최종 출장 팀요미우리 자이언츠
드래프트1965년 드래프트 1순위
NPB 통계
승-패203승 139패
평균 자책점3.27
탈삼진1,865
타율0.172
안타174
홈런21
타점82
수상 경력
신인왕1966년 센트럴 리그 신인왕
사와무라 상2회 (1966년, 1972년)
센트럴 리그 MVP1972년
노히트 노런1967년 10월 10일 달성
명예의 전당 헌액2008년
헌액 유형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선수 경력
소속 팀요미우리 자이언츠 (1966-1983)
감독/코치 경력
소속 팀요미우리 자이언츠 (1982-1985, 1993-1998, 2004-2005)
정치 경력
정당자유민주당
직책참의원 의원
선거구비례구
당선 횟수1회
임기 시작2013년 8월 6일
임기 종료2016년 7월 25일
웹사이트호리우치 쓰네오 공식 웹사이트

2. 선수 시절

야마나시현 고후시 출신으로 고후 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1965년 드래프트 1순위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1983년 은퇴할 때까지 18년간 한 팀에서만 활약한 투수이다.

데뷔 첫 해인 1966년에 16승(14선발승) 2패, 평균자책점 1.39, 승률 .889를 기록하며 센트럴 리그 신인왕과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등과 함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성기인 9년 연속 일본 선수권 시리즈 우승(1965년~1973년, 통칭 '''V9''') 시대의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다.

선수 생활 동안 1972년 센트럴 리그 MVP 수상 및 사와무라 에이지상 재수상, 1972년과 1973년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MVP, 1972년부터 7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 수상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4] 1980년에는 개인 통산 200승을 달성하여 메이큐카이에 가입했다.

뛰어난 투구 능력 외에도 통산 21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1967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를 상대로 노히터를 달성한 경기에서는 투수 최초로 3타석 연속 홈런을 치는 진기록을 세우는 등 타격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71] 수비 능력 또한 뛰어나 7년 연속 골든 글러브 수상으로 이어졌다.[72][73]

1982년부터 투수 코치를 겸임했으며, 1983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통산 성적은 203승(183선발승) 139패 6세이브, 1865탈삼진, 평균자책점 3.27이다. 그가 오랫동안 사용했던 등번호 18번은 은퇴 후 에가와 스구루에게 제안되었으나 에가와가 고사했다는 일화가 있다.[88][89]

2. 1. 프로 입단 전

야마나시현 고후시 출신이다.[5] 양잠업(생사 공장 경영)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5] 초등학교 시절 오른손 검지를 우동 제작기에 끼어 몇 밀리미터 잘리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손톱에는 영향이 없어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었다. 변형된 손가락 모양은 그만의 독특하고 큰 드롭 커브를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6]

고후 시립 미나미 중학교 1학년 때는 허드렛일이 없다는 이유로 축구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야구부장의 끈질긴 권유로 2학년 때 야구부로 옮겼는데, 본인은 마지못해 옮겼다고 회상했다.[7]

중학교 졸업 후 호세이 제2 고등학교 진학을 원했지만 추천에서 떨어져 고후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8] 1학년 때부터 중견수 겸 예비 투수로 뛰었다. 1963년 여름 고시엔 야마나시현 예선 결승에서는 3학년 에이스 오이시 가쓰히코를 구원 등판하여 기산 공업고등학교를 꺾고 우승했다. 하지만 제45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는 기념 대회라 출전 학교가 많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고시엔 구장을 함께 사용했다. 고후 상업고등학교는 니시노미야 구장 조에 편성되어 고시엔 구장에서는 경기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만화 『거인의 별』에서도 다뤄졌다. 대회에서 고후 상업고등학교는 다케오 고등학교와 미야자키 상업고등학교를 꺾고 야마나시현 학교 최초로 3회전에 진출했지만, 그해 우승팀인 메이세이 고등학교에 0-11로 크게 졌다. 호리우치는 이 대회에서 구원 투수로 2경기에 등판했다. 당시 팀에는 2년 선배인 아메미야 가쓰토시(우익수)가 있었다.[9]

2학년이 된 1964년 여름에는 에이스로서 팀을 이끌고 서관동 대회 결승까지 진출했지만, 구마가야 상업고등학교에 0-1로 아쉽게 패했다. 같은 해 가을 관동 대회에서도 결승에 올랐으나, 도쿄 농업대학 제2 고등학교의 투수 가시데 사부로 등에게 막혀 완봉패하며 봄 고시엔 선발 대회 출전권을 놓쳤다. 3학년이 된 1965년 여름에도 서관동 대회 준결승에서 구마가야 상업고등학교에 패했다. 결국 고등학교 시절 여름 고시엔 전국 대회에는 출전했지만, 앞서 언급한 이유로 실제 고시엔 구장의 흙을 밟아보지는 못했다.

2. 2.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6년 ~ 1983년)

야마나시현 고후시 출신으로 고후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호리우치는 1965년 제1회 드래프트 회의에서 1순위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지명되어 입단했다. 입단 당시 계약금은 1000만였으며[12], 초기 등번호는 21번이었다.

데뷔 첫 해인 1966년, 호리우치는 16승(14선발승) 2패, 리그 최고인 평균자책점 1.39, 승률 .889라는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이 활약으로 센트럴 리그 신인왕과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동시에 수상했으며, '사와무라 2세'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한 44이닝 연속 무실점, 개막 13연승(센트럴 리그 신인 기록) 등 인상적인 기록을 세우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1967년부터 등번호를 18번으로 변경했으나, 그해 1월 허리 부상(추간판 헤르니아)을 당해 시즌 초반 결장했다[14][16]. 7월 말 복귀하여 12승(평균자책점 2.17, 리그 3위)을 기록하며 다시 한번 최고 승률 타이틀을 차지했다. 특히 10월 10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에서는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동시에, 투수로서는 최초로 3타석 연속 홈런을 치는 진기록을 세웠다[15].

1968년에는 17승을 거두며 처음으로 팀 내 다승왕이 되었고,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캠프에 참가하여 빌 싱어로부터 체인지업을 배웠다[17]. 1969년에는 14승 13패를 기록했다. 이 시기 호리우치는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등과 함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9년 연속 일본 시리즈 제패(1965년~1973년), 이른바 '''V9''' 시대의 핵심 투수로 활약했다.

1972년은 호리우치에게 최고의 해였다. 처음으로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아 26승(24선발승) 9패, 평균자책점 2.91, 26완투를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이 해 센트럴 리그 MVP (V9 기간 중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외 유일한 수상자)[25], 사와무라 에이지상 (통산 2번째), 최다승[22], 베스트 나인[23], 일본 시리즈 MVP를 휩쓸었다. 그의 시즌 26승은 센트럴 리그에서 시즌 25승 이상을 기록한 마지막 사례로 남아있다[24]. 이 해 활약으로 연봉은 현역 시절 최고액인 1800만로 인상되었다[26][27].

1973년에는 전년도의 혹사 여파로 정규 시즌 성적은 12승 17패, 평균자책점 4.52로 부진했지만, 난카이 호크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3경기에 등판해 2승 무패, 평균자책점 0.91을 기록하고 타석에서도 2홈런과 결승타를 치는 등 투타에서 맹활약하며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MVP와 최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

1974년에는 19승, 평균자책점 2.66(리그 4위), 리그 최다인 21완투를 기록하며 두 번째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75년에는 10승을 올렸지만 리그 최다인 18패를 기록했고, 팀도 창단 첫 최하위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호리우치는 1978년까지 13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며[28] V9 시대의 에이스로서 꾸준히 활약했다. 또한, 1972년부터 1978년까지 골든 글러브상 (투수 부문)을 7년 연속 수상했는데, 이는 센트럴 리그 투수 최초의 수상이었다[4].

선수 생활 말년에는 슬라이더를 익혔으나 이로 인해 직구와 커브의 위력이 감소했다는 평가도 있다[29]. 1979년 4월 9일 주니치전에서는 팀 통산 3000승째의 승리 투수가 되었지만, 시즌 성적은 4승 7패에 그쳤다.

1980년 6월 2일, 야쿠르트전에서 승리하며 역대 16번째이자 자이언츠 소속 선수로는 나카오 세키시에 이어 두 번째로 개인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31][32]. 이로써 메이큐카이에 가입했다. 그해 은퇴한 오 사다하루와의 팬 감사 데이 이벤트 경기에서는 투타 맞대결을 펼치기도 했다[33][34].

1981년 후지타 모토시 감독 부임 이후 에가와 스구루, 니시모토 세이, 사다오카 쇼지 등 젊은 투수들의 등장으로 등판 기회가 급격히 줄었고, 1981년 일본 시리즈에는 등판하지 못했다. 1982년부터는 투수 코치를 겸임했다[35].

1983년 시즌 종료 후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 10월 22일 다이요 웨일스와의 은퇴 경기에서는 8회에 등판하여 2이닝을 던져 세이브를 기록했고, 현역 마지막 타석에서는 홈런을 치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36][37]. 은퇴 경기 후 열린 1983년 일본 시리즈에는 출전하지 않았다[38].

호리우치는 18년간의 선수 생활 동안 오직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만 뛰며 통산 203승(183선발승) 139패 6세이브, 1865탈삼진, 평균자책점 3.27을 기록했다. 그는 최고 승률 타이틀을 3회 획득(센트럴 리그 최다 타이)했으며, 올스타전 통산 평균자책점 1.44는 NPB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가 오랫동안 사용했던 등번호 18번은 은퇴 후 에가와 스구루에게 제안되었으나 에가와가 고사했다[88][89].

3. 지도자 시절

은퇴 후 니혼 TV 야구 해설위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투수 코치 및 수석 코치, 감독 등을 역임하며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요미우리에서는 두 차례(1984년~1985년, 1993년~1998년)에 걸쳐 투수 코치를 맡았고, 1998년에는 수석 코치로 승격되기도 했다. 코치직을 수행하지 않는 기간(1986년~1992년, 1999년~2003년)에는 주로 니혼 TV 야구 해설위원 및 평론가로 활동했다.

2003년 시즌 후 하라 다쓰노리의 후임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으로 부임하여 2004년과 2005년 두 시즌 동안 팀을 이끌었다. 그러나 2005년 시즌에는 주전 선수들의 연이은 부상 등의 악재 속에서 팀이 부진에 빠졌고, 결국 62승 80패로 리그 5위에 그치며 당시 구단 역사상 한 시즌 최다 패배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기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감독 퇴임 후인 2006년부터는 다시 니혼 TV 야구 해설위원 및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8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선수 부문에 헌액되었다.

기간직책소속/방송사
1984년 ~ 1985년1군 투수 코치요미우리 자이언츠
1986년 ~ 1992년야구 해설 위원, 평론가니혼 TV, 라디오 일본, 스포츠 호치
1993년 ~ 1997년1군 투수 코치요미우리 자이언츠
1998년수석 코치요미우리 자이언츠
1999년 ~ 2003년야구 해설 위원니혼 TV
2004년 ~ 2005년감독요미우리 자이언츠
2006년 ~ 현재야구 해설 위원, 평론가니혼 TV


3. 1.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 (1984년 ~ 1985년, 1993년 ~ 1998년)

은퇴 후인 1984년부터 왕정치 감독 아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 코치를 맡았다. 그러나 1985년 1월 27일, 다마가와 구장에서 소 겐사 서브 매니저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소 매니저가 연습 시작 전 팬들에게 퇴장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호리우치의 지인 아이에게 "나가 줘"라는 거친 말투를 사용한 것에 격분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로 호리우치는 다음 날 토다 히사오 1군 매니저에게 엄중 경고를 받았고, 소 매니저 역시 주의를 받았다[40]. 같은 해 호리우치는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니혼TV·라디오 일본 해설자 및 스포츠 호치 평론가로 활동하다가(1986년 ~ 1992년), 1993년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체제 하에서 1군 투수 코치로 복귀했다. 1997년까지 투수 코치를 맡았고, 1998년에는 수석 코치로 승격되었다.

3. 2.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2004년 ~ 2005년)

2003년 하라 다쓰노리 감독이 사임한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차기 감독으로 부임했다.

2004년 시즌에는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에서 타피 로즈,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고쿠보 히로키를 영입하며 강력한 타선을 구축했다. 고쿠보는 부상에서 복귀해 41홈런, 96타점을 기록했고, 로즈는 45홈런, 99타점으로 맹타를 휘두르며 홈런왕과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니시 히사히사, 시미즈 타카유키, 로즈, 다카하시 요시노부, 고쿠보, 페타지니, 아베 신노스케, 니오카 토모히로로 이어지는 타선은 "사상 최강 타선"으로 불리며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인 팀 259홈런을 달성했다. 그러나 투수진의 부진을 메우지 못하고, 시즌 초반 3연패에도 불구하고 전반기에는 우승 경쟁을 벌였으나 6월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이끄는 주니치와의 홈 3연전에서 모두 패배하며 선두 자리를 내주었고 이후 부진했다. 결국 우승팀 주니치에 8경기 차 뒤진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2005년 시즌에는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부상이라는 악재가 겹치면서 팀 전체가 침체에 빠졌다. 결국 62승 80패로 리그 5위에 그쳤는데, 이는 당시 구단 창단 이래 한 시즌 최다 패배 기록이었다. 이처럼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4. 정치 활동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퇴임 후, 2010년 제2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자유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2][3] 이후 2013년, 비례대표 의원의 결원으로 의원직을 승계하여 참의원 의원이 되었다.

4. 1. 참의원 의원 (2013년 ~ 2016년)

2010년 4월 22일, 같은 해 7월에 열리는 제2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자유민주당 후보로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7월 11일 개표 결과, 비례대표로 출마하여 101,840표를 얻어 당내 13위를 기록했다.[2][3] 하지만 당시 자유민주당은 비례대표 의석을 12석만 확보했기 때문에 낙선했다.

호리우치는 2010년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자유민주당 비례대표 명단 13순위였기 때문에, 임기 중 비례대표 의석에 결원이 생길 경우 별도의 선거 없이 의원직을 승계하는 첫 번째 순위였다. 2013년 7월 31일, 자유민주당 소속 참의원 비례대표 의원이었던 나카무라 히로히코가 사망하자, 호리우치는 그의 자리를 승계하여 2013년 8월 6일부터 참의원 의원이 되었다. 그의 임기는 2010년 당선자의 잔여 임기인 2016년까지였다.

참의원 의원 재임 중에는 문교과학위원회, 행정감시위원회, 동일본 대지진 부흥 및 원자력 문제 특별위원회 등에서 활동했다.[87]

5. 은퇴 이후

니혼 TV 야구 해설위원, 요미우리의 투수 코치(1984년~1985년)와 수석 코치(1993년~1998년)를 역임했다.

2003년,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사임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으로 부임했다. 감독 부임 전 해설자 시절에는 "올해는 우리와 주니치의 양강 구도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전년도의 반성을 바탕으로 "수비 야구"를 프런트에 요청하여 중견수 게이브 캡러, 마무리 투수 댄 미셀리를 영입했다.[46] 당초 페타지니기요하라 가즈히로를 주전에서 제외하고 시미즈를 1루수로 기용할 구상이었으나, 계약 기간이 남은 기요하라가 구단에 직접 항의했고, 호리우치 역시 구단 프런트의 의사를 받아들여 기요하라를 4번 타자 겸 1루수로 개막전에 기용했다.

그러나 감독 재임 기간 동안 팀 성적은 부진했다. 2004년에 이어 2005년에도 개막 3연패를 당했다. 야심차게 영입한 미셀리는 4경기에서 0승 2패, 평균자책점 23.63을 기록하며 부진 끝에 개막 한 달도 안 되어 방출되었고, 캡러 역시 수비에서 실책을 보이고 타격에서도 타율 .153, 3홈런, 6타점에 그치는 등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시즌 중에는 로즈가 코치진과의 마찰로 수뇌부를 비판하는 일이 있었고[47], 기요하라는 부상과 부진으로 2군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포수 아베를 어깨 부상에도 불구하고 1루수로 기용하는 등 선수 기용에 어려움을 겪었다.

2005년 시즌 막판에는 다카하시 요시노부, 로즈, 기요하라 등 주축 선수들이 부상으로 이탈했지만, 야노 겐지, 가메이 요시유키 등 젊은 선수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팀 평균자책점은 2년 연속 구단 최악 기록을 경신했고, 팀은 5위(62승 80패)에 그치며 8년 만의 B클래스(하위권)로 추락했다.[49] 80패는 당시 구단 역사상 최다 패배 기록이었다. 일부 주간지에서는 호리우치의 지도력을 비판하는 기사가 계속 나왔고, 8월 말에는 사임 의사를 굳혔다고 전해졌다.[48] 시즌 최종전 홈 경기 후에는 팬들이 お前が悪いんだ堀内!|오마에가 와루인다 호리우치!일본어(네가 잘못했어 호리우치!)라고 외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여 예정되었던 세리머니가 취소되기도 했다.[50] 결국 시즌 종료 후 敗軍の将、兵を語らず|하이군노 쇼, 헤이오 카타라즈일본어(패장은 병사를 논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호리우치 본인은 해임되었다고 주장한다).[51] 호리우치는 요미우리 감독 재임 중 한 번도 리그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고, 통산 승률 5할 미만으로 퇴임한 최초의 요미우리 감독이 되었다. 후에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요미우리 감독을 맡았던 다카하시 요시노부 역시 재임 중 리그 우승 없이 퇴임했지만, 통산 승률은 5할을 넘었으므로(.502), 승률 5할 미만으로 퇴임한 요미우리 감독은 2020년 기준으로 호리우치가 유일하다. 후임으로는 전임 감독이었던 하라 다쓰노리가 다시 부임했다.

감독 퇴임 후인 2005년 11월, 요미우리 송년회에 참석하여 선수들에게 "올해 패배의 분함과 고통을 발판 삼아 하라 감독 아래에서 우승해주기를 바란다"고 격려했다. 당시 선수들과의 불화설도 보도되었으나, 니시 등 주축 야수들은 퇴임 기자회견에서 헹가래를 쳐주지 못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고쿠보 히로키는 "호리우치 씨 한 사람의 탓으로 돌릴 수도 있지만, 실제로 플레이하는 것은 우리"라며 호리우치를 옹호했다. 구도 기미야스는 2004년 개인 통산 200승 달성을 앞두고 부진했지만 호리우치가 계속 선발로 기용해준 덕분에 200승을 달성할 수 있었다며 "팀이 그런 상황에서 젊은 선수들을 시험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저를 써주셔서 정말 구원받았다.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고 술회했다.[52] 또한 2005년 2군에 있던 우치우미 테츠야의 재능을 알아보고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시켰는데[53], 비록 그 해 성적은 4승 9패에 그쳤지만 이후 우치우미는 팀의 에이스로 성장했고,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은 이기지 못해도 호리우치 씨가 써주신 덕분"이라고 감사를 표했다.[54] 반면, 기요하라 가즈히로와는 갈등이 깊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기요하라는 은퇴 후에도 호리우치를 비판하는 발언을 이어갔다.[55][56] 당시 팀 동료였던 다카하시 나오나리는 이 무렵 팀 상황에 대해 "전원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듯한 팀이었다", "(팀 내에서) 이야기도 꽤 했지만, (각 선수들의) 개성이 너무 강해서 뭉쳐지지 않았다"고 밝히는 한편, 호리우치에 대해서는 "(이 무렵은 팀의 변환기였고) 엄청난 바바(폭탄 돌리기 게임의 조커)를 뽑은 감독이었다", "(당시의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팀에서 구단 전체까지 모든 통풍이 좋지 않았다", "누가 나쁘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누가 감독을 해도 아마 잘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옹호하는 코멘트를 남겼다.[57]

감독 퇴임 후에는 다시 니혼 TV 야구 해설위원 등 평론가로 활동했다. 2008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선수 부문에 헌액되었다.

2010년 7월 제2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자유민주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으나[58], 101,840표를 얻어 당내 13위로 차점 낙선했다. 선거 운동 당시 일본의 외국인 참정권과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 도입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59] 2013년 7월 31일, 같은 당 소속 나카무라 히로히코 의원의 사망으로 의원직 승계 자격이 생기자[60], 8월 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고시를 통해 보궐 당선되어 참의원 의원이 되었다.[61][62] 2016년 7월 제24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다시 자유민주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으나, 84,597표(당내 22위)를 얻는 데 그쳐 낙선했다.[63]

2022년 10월에는 뇌 혈전으로 인해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으나, 이후에도 전국 야구 교실 강사 등으로 활동하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64]

=== 방송 출연 ===


  • 다음 순간, 뜨거워져라. THE BASEBALL (니혼 TV・BS 니혼・Nittele G+) : 해설자 (1986년-1992년, 1999년-2003년, 2006년-2016년. 2014년 이후는 원칙적으로 토・일요일의 BS・CS 중계만 출연)
  • 라디오 일본 자이언츠 나이터 (RF 라디오 일본) : 해설자 (1986년-1992년)
  • 언제 봐도 파란만장 (니혼 TV) : 게스트
  • 비밀의 켄민 SHOW (요미우리 TV) : 게스트
  • 개운! 무엇이든 감정단 (TV 도쿄) : 게스트 (2010년 8월 24일)
  • 다케다 와카코의 피탓토。 (ABC 라디오) : 「후쿠모토 유타카의 그 사람은 지금 전・프로 야구 선수 명감」 게스트 (2014년 12월 18일)
  • 선데이 모닝 (TBS 텔레비전) : 게스트

6. 논란 및 평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V9 시대를 이끈 에이스 투수였지만, 뻔뻔한 태도로 인해 "악동" 또는 "가이의 소텐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74] 당시 기숙사 사감이었던 타케미야 토시아키는 호리우치를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3악" 중 한 명으로 꼽기도 했다.[75][76] 기숙사 생활 중 통금 시간을 자주 어겼으며, 목욕탕 창문으로 몰래 들어가거나 비상용 사다리를 사서 기숙사를 빠져나가기도 했다. 이 때문에 왕정치에게 맞은 적도 있다고 알려졌으나, 호리우치 본인은 원정지에서의 일이라고 주장하며 "성적이 우수해서 선배들의 질투로 왕 씨가 대표로 때린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본인에 따르면 통금 위반은 입단 3~4년차부터 시작했고, 100회 이상 규칙을 어겼지만 발각된 것은 3번뿐이라고 한다. 발각 시에는 타케미야에게 죽도로 맞았는데, 이 모습이 기숙사 내 방송으로 중계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선수 은퇴 후 정치에 입문하여 2010년 7월 제2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자유민주당 후보로 비례대표에 출마했으나 차점으로 낙선했다.[58] 당시 외국인 참정권과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59] 2013년 7월 나카무라 히로히코 의원의 사망으로 보궐 당선 자격이 생겨 이를 수락했고,[60] 8월 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고시로 당선이 확정되어 참의원 의원이 되었다.[61][62] 2016년 7월 제24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재출마했으나 낙선했다.[63]

선수, 코치, 감독, 해설자로서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상대 팀의 우승 세리머니를 지켜봐야 했던 6번의 사례 중 5번(1975년 선수, 1995년 코치, 2005년 감독, 2006년 및 2016년 해설자)이나 현장에 있었다는 특이한 이력이 있다.

6. 1. 감독 시절 논란

하라 다쓰노리의 후임으로 2003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에 부임했다. 2004년 시즌에는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에서 타피 로즈,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고쿠보 히로키를 영입하며 퍼시픽 리그 홈런왕 출신 타자 두 명을 동시에 합류시키는 등 타선 강화에 힘썼다. 고쿠보는 부상 공백에도 불구하고 41홈런, 96타점으로 부활했고, 로즈 역시 45홈런, 99타점으로 홈런왕과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니시 히사히사, 시미즈 타카유키, 로즈, 다카하시 요시노부, 고쿠보, 페타지니, 아베 신노스케, 니오카 토모히로로 이어지는 타선은 팀 홈런 259개라는 프로 야구 신기록을 세우며 "사상 최강 타선"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타선에도 불구하고 투수진의 부진을 극복하지 못했다. 시즌 초반 우승 경쟁을 벌였으나, 6월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이끄는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3연전에서 모두 패배하며 선두 자리를 내준 뒤 부진에 빠졌다. 결국 우승팀 주니치에 8경기 차 뒤진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2005년 시즌에는 주전 선수들의 연이은 부상 악재 속에 팀 전체가 침체에 빠졌다. 결국 62승 80패로 리그 5위에 그쳤는데, 이는 당시 구단 창단 이래 최다 패배 기록이었다. 이처럼 최악의 성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6. 2. 긍정적 평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V9 시대를 이끈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다.[4] 시즌 최고 승률 .889는 센트럴 리그 기록이며, 최고 승률 타이틀을 센트럴 리그 최다 타이기록인 3회 획득했다. 또한, 센트럴 리그 최초로 투수 부문 다이아몬드 글러브상(현재의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4] 올스타전에서는 통산 방어율 1.44라는 NPB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투구 스타일은 공의 구위가 가볍지만 날카로웠으며, 멀리서 아치형으로 뻗어 나가는 직구와 한 번 떠올랐다가 급격히 꺾여 떨어지는 큰 커브, 그리고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베로 비치 캠프에서 빌 싱어에게 배운 체인지업을 주무기로 삼았다. 제구는 다소 불안정했지만 결정적인 상황에서 실투가 적었고 위기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체중 배분이 이상적인 균형 잡힌 체격을 갖추고 있었다.[65] 신인 시절 개막 연승 기록을 세울 당시, 주간 아사히 편집부가 홈 플레이트 위에 설치한 광전식 속도 측정 장치로 측정한 결과 155km/h의 구속을 기록하기도 했다.[66]

경기 후에는 스코어러의 자료를 바탕으로 타자별 투구 내용을 세세하게 분석하여 노트에 기록했으며, 선발 등판 전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진지하게 투구 계획을 세웠다. 경기 전이나 캠프 미팅에서도 조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모든 내용을 꼼꼼히 노트에 기록하는 성실함을 보였다.[67]

입단 초기에는 던진 후 모자가 옆으로 흔들릴 정도로 역동적인 투구 폼이 특징이었는데,[68] 이는 다소 큰 모자를 쓰고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이었다. 펄쩍 뛰는 듯한 역동적인 폼으로 투구 시 왼발의 스텝 폭은 투수판에서 발 길이로 7발자국에 달했다. 하지만 선수 생활 후반기에는 근력 저하로 스텝 폭이 6발자국으로 줄었고, 1978년경 봄 캠프에서 다시 스텝 폭을 넓히려 했으나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69] 어깨가 매우 강해 다마가와 그라운드의 좌중간 펜스에 몸을 붙인 상태에서 원 스텝만으로 1루 벤치 위를 넘기는 공을 던질 수 있었다.[70]

타격 능력 또한 뛰어나 투수로서 통산 21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특히 1967년 10월 10일 히로시마전(고라쿠엔 구장)에서는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는 동시에[71] 스스로 3타석 연속 홈런을 치는 진기록을 세웠다. 투수가 기록한 3타석 연속 홈런은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기록이다. 호리우치 본인은 은퇴 후 이 경기에 대해 "4타석째에 홈런을 치지 못하고 중전 안타에 그쳐 실망하며 벤치로 돌아갔다. 타격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다른 선수들이 말해주기 전까지 노히트노런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4타석 연속 홈런 대신 노히트노런이라니 괜찮아', '아, 어쩔 수 없지, 그럼 노히트노런이라도 할까'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1973년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는 홈런 2개를 기록했는데, 일본 시리즈에서 투수가 한 경기에 2개 이상의 홈런을 친 것 역시 사상 유일하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1972년1973년,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1983년 은퇴 경기에서도 당시 다이요의 투수 가네자와 쓰구오를 상대로 홈런을 기록했다.

수비에서도 뛰어난 반사 신경과 운동 능력을 보여주며 골든 글러브가 창설된 1972년부터 7년 연속 수상했다. 그의 수비 능력에 대해 한신 타이거스의 후지타 히라는 "마치 야수처럼 잘했다"고 평가했다.[72] 퀵 모션에도 매우 능숙하여, 일본 시리즈에서 맞붙었던 후쿠모토 유타카는 "저런 퀵 모션은 처음 봤다. 작은 퀵 모션으로 여러 코스에 빠른 공을 던져서 버릇을 간파할 수 없었다. 퍼시픽 리그에는 저런 퀵 모션을 할 수 있는 투수는 없다"고 칭찬했다.[73]

겉으로는 뻔뻔한 태도로 "악동" 또는 "가이의 소텐구"라는 별명을 얻었지만,[74] 인정 많은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야구부 주장을 맡으면서 상급생이 이유 없이 하급생을 구타하는 악습을 금지하고 약자를 괴롭히는 행위를 중단시켰다.[78] 또한, 시즌 도중 개인 사정으로 팀을 떠나게 된 동료 저스틴 스모크에 대해 "가족을 위해서라면 당연하다"며 비난하지 않고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79] 등판 전날에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는 등 철저한 자기 관리를 했다고 스미 요리오가 회고하고 있다.[80] 젊은 시절에는 화술을 배우기 위해 신주쿠의 요세(일본의 만담 극장)에 매일 다닌 적도 있으며, 이를 투구에도 활용하려 노력했다고 한다.[81] 은퇴 후에는 NFL에 대한 깊은 조예를 쌓아 해설자로 활동하기도 했다.[82]

7. 수상 및 타이틀 경력

호리우치 쓰네오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수많은 타이틀과 상을 수상했다. 데뷔 첫 해인 1966년에는 16승 2패, 평균자책점 1.39의 뛰어난 성적으로 센트럴 리그 신인왕과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동시에 석권했다. 그는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등과 함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V9(1965년~1973년, 9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 시대의 핵심 투수로 활약했다.

1972년에는 26승을 기록하며 센트럴 리그 MVP와 두 번째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수상했고, 그해 최고 승률과 다승왕 타이틀도 차지했다. 또한, 1972년1973년에는 2년 연속으로 일본 시리즈 MVP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뛰어난 수비력을 인정받아 1972년부터 1978년까지 7년 연속으로 골든 글러브상(투수 부문)을 수상했으며, 이는 센트럴 리그 투수 최초의 수상 기록이기도 하다.[4] 1980년에는 개인 통산 200승을 달성하여 메이큐카이에 가입했고, 은퇴 후인 2008년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7. 1. 타이틀


  • 최고 평균자책점: 1회 (1966년)
  • 최고 승률: 3회 (1966년, 1967년, 1972년) ※ 3회 수상은 센트럴 리그 최다 타이 기록이며, 신인 시절부터 2년 연속 수상은 사상 유일하다. 2년 연속 수상 기록은 후지타 모토시, 기타벳푸 마나부, 아오야기 코요와 함께 센트럴 리그 최장 타이 기록이다.
  • 다승왕: 1회 (1972년)
  • 최다 선발승: 2회 (1972년 24선발승, 1974년 19선발승(마쓰모토 유키쓰라와 공동 1위))
  • 신인왕: 1회 (1966년)
  • MVP: 1회 (1972년)
  • 최우수 투수: 2회 (1972년, 1974년)
  • 사와무라 에이지상: 2회 (1966년, 1972년)
  • 베스트 나인 (투수 부문): 2회 (1972년, 1974년)
  • 골든 글러브상 (투수 부문): 7회 (1972년 ~ 1978년)
  • 일본 시리즈 MVP: 2회 (1972년, 1973년)
  • 일본 시리즈 최우수 투수상: 4회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2008년)


=== 첫 기록 ===

  • 첫 등판·첫 선발·첫 승리: 1966년 4월 14일, 대 주니치 드래곤즈 3차전(나고야 구장), 6이닝 2실점
  • 첫 탈삼진: 상동, 4회말 진 스티븐스로부터
  • 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 1966년 5월 30일, 대 다이요 웨일스 11차전(가와사키 구장)
  • 첫 세이브: 1974년 5월 5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5차전(고라쿠엔 구장), 9회초 구원 등판하여 1이닝 무실점


=== 주요 기록 ===

=== 정규 시즌 ===

  • 신인 시즌 개막 13연승 (1966년)
  • 시즌 개막 13연승 (1966년) ※ 스가노 도모유키와 센트럴 리그 타이기록
  • 고졸 신인 센트럴 리그 기록 (1966년): 시즌 14완투, 7완봉, 16승, 평균자책점 1.39
  • 노히트 노런: 1회 (1967년 10월 10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2차전(고라쿠엔 구장)) ※ 역대 38번째
  • 투수 1경기 3홈런: 상동 ※ 가와사키 노리쓰구에 이은 역대 2번째, 3타석 연속 홈런은 사상 최초
  • 시즌 최고 승률: .889 (1966년, 16승 2패, 센트럴 리그 기록)


=== 일본 시리즈 ===

  • 통산 최다 등판: 27경기
  • 통산 최다 투구 이닝: 140.1 이닝
  • 통산 최다 승리: 11승 (시리즈 타이기록)
  • 통산 최다 사사구: 61개
  • 투수 1경기 2홈런: 1973년 3차전 (사상 유일)


=== 올스타전 ===

  • 올스타전 출장: 9회 (1966년,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 통산 평균자책점 1.44: 20이닝 이상 투구 투수 중 역대 1위

7. 2. 수상


  • 다승왕: 1회 (1972년)
  • 최우수 평균자책점: 1회 (1966년)
  • 최고 승률: 3회 (1966년, 1967년, 1972년) ※3회 수상은 센트럴 리그 최다 타이 기록, 신인부터 2년 연속 수상은 사상 유일.
  • 사와무라 에이지상: 2회 (1966년, 1972년)
  • 최우수 선수(MVP): 1회 (1972년)
  • 신인왕 (1966년)
  • 베스트 나인: 2회 (1972년, 1974년) ※투수 부문
  • 골든 글러브상: 7회 (1972년 ~ 1978년) ※투수 부문. 1972년은 투수 부문 센트럴 리그 사상 최초 수상[4], 7년 연속 수상은 니시모토 다카시와 함께 투수 부문 최장 타이 기록.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2008년) ※경기자 부문 표창
  • 일본 시리즈 MVP: 2회 (1972년, 1973년)
  • 일본 시리즈 최우수 투수상: 4회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 최우수 투수: 2회 (1972년, 1974년)
  •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수훈상: 1회 (1972년)[84]

8. 등번호


  • '''21''' (1966년)
  • '''18''' (1967년 ~ 1984년 중도) -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투수에게 주어지는 전통적인 등번호이다. 호리우치는 1967년부터 이 번호를 달았고, 1983년 선수 은퇴 후 코치로 활동하며 1984년 중도까지 사용했다.[88] 그가 18번을 사용한 후 1979년부터 30번을 달았던 에가와 스구루에게 18번을 제안했으나 에가와는 이를 고사했다.[89] 현재 이 번호는 구와타 마스미의 준 영구 결번으로 여겨진다.
  • '''73''' (1984년 중도 ~ 1985년) - 투수 코치 시절
  • '''70''' (1993년 ~ 1998년) - 투수 코치 시절
  • '''88''' (2004년 ~ 2005년) - 감독 시절

참조

[1] 뉴스 Kawakami's philosophy as manager never wavered http://www.japantime[...] Japan Times 2013-11-28
[2] 웹사이트 Parties pin poll hopes on sports star power http://search.japant[...]
[3] 뉴스 Councillors election special 2010, proportional results: Liberal Democratic Party http://www.yomiuri.c[...] Yomiuri Shimbun
[4] 웹사이트 三井ゴールデングラブ賞 歴代受賞選手 https://mgg.mitsuipr[...] 2021-02-17
[5] 서적 『オレは悪太郎―わが投手人生のMemoir』
[6] 서적 ただ栄光のために-堀内恒夫物語- 文春文庫 1995-07-10
[7] 서적 『オレは悪太郎―わが投手人生のMemoir』
[8] 서적 『魔球伝説-プロ野球不滅のヒーローたち』
[9] 서적 『プロ野球人名事典1999』 日刊アソシエーツ
[10] 블로그 「俺のドラフト 巨人1位指名となるまで」堀内恒夫ブログ、2017年11月01日 https://ameblo.jp/ho[...] 2017-11-01
[11] 서적 『魔球伝説-プロ野球不멸의 ヒーローたち』
[12] 서적 『魔球伝説-プロ野球不滅のヒーローたち』
[13] 뉴스 [時代の証言者]エースの本懐 堀内恒夫<17>分厚くみせた給料袋 https://www.yomiuri.[...] 読売新聞
[14] 서적 ただ栄光のために―堀内恒夫物語― 文春문고
[15] 웹사이트 堀内恒夫のワンマンショー! 3本塁打&ノーヒットノーラン(1/2ページ) https://www.zakzak.c[...] 2024-08-13
[16] 서적 ただ栄光のために―堀内恒夫物語― 신潮문고 1985-02-01
[17] 서적 ただ栄光のために―堀内恒夫物語― 문春문고
[18] 서적 『魔球伝説-プロ野球不滅のヒーローたち』
[19] 서적 『魔球伝説-プロ野球不滅のヒーローたち』
[20] 뉴스 스포츠보치 1972-06-10
[21] 뉴스 読売新聞 1972-04-01/1972-10-31
[22] 웹사이트 【野球】子年のプロ野球 巨人&オリックスに縁起よし? https://www.daily.co[...] 2022-06-22
[23] 웹사이트 帝京平成大中野で巨人軍OB堀内恒夫さん講演「私の野球人生」テーマに、抽選会も http://nakano.keizai[...] 2016-01-20
[24] 서적 프로야구 데이터 사전 PHP연구소
[25] 웹사이트 세・리그 역대 MVP http://www.sanspo.co[...] 2016-01-20
[26] 웹사이트 堀内さん「今の時代に現役やってたらいくらもらえてたかなぁ(笑)」最高年俸は26勝した時の1800万円― 스포니치 Sponichi Annex https://www.sponichi[...]
[27] Youtube 1973일본시리즈〜巨人V9의 무대뒤의 뒤。 https://www.youtube.[...]
[28] 서적 프로야구 데이터 사전 PHP연구소
[29] 서적 『魔球伝説-プロ野球不滅のヒーローたち』
[30] 서적 『豪球列伝-プロ野球不滅のヒーローたち』
[31] 웹사이트 【6月2日】1980年(昭55) 雨に濡れ涙に濡れた堀内恒夫 200勝達成 https://web.archive.[...] 2019-03-22
[32] 웹사이트 【巨人・今日は何の日】堀内 雨の200勝に大泣き https://hochi.news/a[...] 2024-08-13
[33] 뉴스 스포츠닛폰 1980-11-24
[34] 웹사이트 長嶋、王、原…巨人のスター選手の引退セレモニー https://www.sponichi[...] 2015-12-18
[35] 서적 ただ栄光のために-堀内恒夫物語- 문春문고 1995-07-10
[36] 뉴스 スポーツ面・社会面 読売新聞 1983-10-23
[37] 뉴스 堀内 華麗な花道 報知新聞 1983-10-23
[38] 간행물 オフィシャルベースボールガイド1984年版
[39] 서적 ただ栄光のために-堀内恒夫物語- 文春文庫 1995-07-10
[40] 뉴스 所サブマネ殴打事件 王監督仕事で返せ「奪回キャンプ」グアム入り 堀内コーチ厳重注意 日刊スポーツ 1985-01-29
[41] 뉴스 朝刊 38面 読売新聞 2000-03-30
[42] 웹사이트 堀内恒夫オフィシャルサイト「プロフィール」 http://www.horisan18[...]
[43] 웹사이트 堀内恒夫オフィシャルサイト「ヒストリー」 http://www.horisan18[...]
[44] 뉴스 巨人、来季コーチ陣を発表=ヘッドコーチに須藤氏-プロ野球 時事通信 2003-10-10
[45] 웹사이트 堀内恒夫G助っ人回顧 監督時、コーチとして呼びたかったのは? https://column.sp.ba[...]
[46] 웹사이트 巨人新守護神にアストロズのミセリ 153キロ、メジャー「Aランク」右腕 https://web.archive.[...] 2004-12-10
[47] 뉴스 3面など サンケイスポーツ 2005-04-27
[48] 뉴스 時代の証言者 堀内恒夫(33) 読売新聞 2024-02-14
[49] 웹사이트 何が起きていたのか? 清原和博容疑者が古巣・巨人を「震撼」させていた:赤坂8丁目発 スポーツ246(5/5 ページ) https://www.itmedia.[...] 2016-02-18
[50] 뉴스 2面など サンケイスポーツ 2005-10-07
[51] 잡지 堀内恒夫から由伸巨人へ 週刊ポスト 2017-07-21
[52] 잡지 週刊ベースボール 2012年1月30日号 2012-01-30
[53] 잡지 週刊ベースボール 2012年5月28日号 2012-05-28
[54] 잡지 雑誌「Number」2009年6月21日号 2009-06-21
[55] 웹사이트 "番長"清原、監督就任の夢語る「修業を続けていきたい」 https://www.cinemaca[...] 2010-05-19
[56] 웹사이트 清原和博&金本知憲「ムカつく奴らシバキ上げ」(4)「堀内! 何が国会議員じゃ!!」 アサ芸プラス https://www.asagei.c[...]
[57] Youtube 【堀内恒夫監督】あの2年間、読売ジャイアンツに何があったのか…髙橋尚成さんだから知る裏事情【プロ野球】 https://www.youtube.[...] 2020-08-03
[58] 웹사이트 堀内・巨人前監督が出馬表明「政界に剛速球」 http://www.yomiuri.c[...] 読売新聞社 2010-04-22
[59] 뉴스 2010参院選 候補者アンケート 毎日jp(毎日新聞社) 2010-06-26
[60] 웹사이트 堀内恒夫氏 自民参院リリーフ登板へ 中村氏死去で繰り上げ当選対象 https://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 2013-08-01
[61] 간행물 官報特別号外(平成25年度第19号)1頁 国立印刷局
[62] 웹사이트 元巨人エースがリリーフ登板 堀内氏の繰り上げ当選決定 https://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 2013-08-06
[63] 웹사이트 比例代表 自由民主党 -参院選- https://www.nhk.or.j[...]
[64] 뉴스 時代の証言者 堀内恒夫(35) 読売新聞 2024-02-16
[65] 서적 ただ栄光のために-堀内恒夫物語- 新潮文庫 1985-02-01
[66] 서적 ただ栄光のために-堀内恒夫物語- 文春文庫 1995-07-10
[67] 서적 ただ栄光のために-堀内恒夫物語- 新潮文庫 1985-02-01
[68] 서적 ただ栄光のために-堀内恒夫物語- 文春文庫 1995-07-10
[69] 서적 プロ野球三国志
[70] 서적 ただ栄光のために-堀内恒夫物語- 新潮文庫 1985-02-01
[71]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12年5月7日号
[72] 웹사이트 藤田平氏、堀内投手とのライバル対決振り返る 69年5・10超満員甲子園で4の4 https://www.daily.co[...] 2020-07-14
[73] 서적 ただ栄光のために-堀内恒夫物語- 新潮文庫 1985-02-01
[74] 서적 日本プロ野球 仰天伝説199連発!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4-10
[75] 웹사이트 堀内恒夫氏 王貞治氏に殴られた巨人寮で過ごした思い出語る https://www.news-pos[...] 2014-08-29
[76] 기사 2019年6月3日発売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 7月号別冊薫風号「ファーム青春物語」内記事『SPECIAL INTERVIEW 堀内恒夫「鬼寮長との闘い」。記事内では堀内による武宮の回顧もされている。
[77] 웹사이트 王貞治氏が鉄拳制裁 殴られた堀内氏「殴り返そうかと思った」 https://www.news-pos[...] 2015-07-14
[78] 서적 ただ栄光のために-堀内恒夫物語- 新潮文庫 1985-02-01
[79] 웹사이트 堀内恒夫氏 巨人・スモークの退団理由に理解「俺だってやめちゃうよ」「ありがとう」 https://www.daily.co[...] 株式会社デイリースポーツ 2021-06-18
[80] 웹사이트 角盈男さん 10週連続“フライデー”された20代のヤンチャ酒 https://www.nikkan-g[...] 2019-04-01
[81] 서적 プロ野球 名選手列伝 驚きの記録を残したツワモノたち 2008-06-15
[82] 뉴스 【NFL】元巨人・堀内恒夫さんは「アメフトやるならRBかWR」 日本のドラフト1期生に聞くNFLの楽しみ方 https://www.bbm-japa[...] BBM SPORTS
[83] 웹사이트 堀内 恒夫(読売ジャイアンツ) {{!}} 個人年度別成績 https://npb.jp/bis/p[...]
[84] 웹사이트 歴代授賞者 http://www.jpsa.jp/a[...] 公益財団法人[[日本プロスポーツ協会]]
[85] 간행물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 Summer issue 2006 No.3「背番号の美学 受け継がれる魂」
[86] 뉴스 沢村賞に楽天の田中将大投手 2度目の受賞「嬉しい」 https://web.archive.[...] 産経新聞 2013-10-28
[87] 웹사이트 堀内 恒夫(ほりうち つねお) https://web.archive.[...]
[88] 뉴스 江川卓、エースの背番号「18」を巨人球団から提案も「固辞したワケ」とは? https://www.asagei.c[...] Asagei plus 2024-02-02
[89] 뉴스 江川卓、エースの背番号「18」を巨人球団から提案も「固辞したワケ」とは? https://www.asagei.c[...] Asagei plus 2024-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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